설교

누가복음 11: 29-36
“이 시대의 표적으로 살자 ”
2017년 3월 19일

얼마전 한국 갤럽에서 조사한 통계를 보면
기독교인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병 고침을 받았거나
그와 유사한 체험을 했다는 사람이 10명 가운데 3명이나 되었다.
그와 반대로 천주교인들은 10명 가운데 1명이고
불교인은 거의 전무한 통계를 보도했다.
그렇다면 한국 기독교인이 일천만 명이라고 가정하면
대략 삼백만 명이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병 고침이나 그와 유사한 체험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도 표적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일어 나고 있다.

그러나 외적인 표적만 찾아 다니는 신앙은 바른 신앙은 아니다.
지금도 그런 신앙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눈으로 표적을 보아야만 예수님을 믿고
표적을 보지 못하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는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무리들의 불신앙과 같다.
표적이란 기적같은 놀라운 사인, 즉 증표를 말한다.
예수님은 많은 표적들을 보여 주셨다.
이런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
14절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쫒으므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받아
귀신을 쫒아 내었다고 주장했다.
바알세불은 파리의 왕이란 뜻인데 예수님이 파리를
지배하는 신의 힘으로 귀신을 쫒아 내었다고
주장을 했으니 얼마나 황당 하셨겠나?
지금도 이런 말도 안되는 잡신들을 믿는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인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얼마나 존귀하고 고상하고
축복받은 존재인지 말로 설명 할수 없는 사람들이다.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무리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표적들을 보았다.
누가복음에만 오늘 11장까지 기록된 것만도 9개 이상이 된다.
이 예수님의 이 표적들과 가르치심을 보고 듣고는
예수님은 분명이 보통 선지자나 선생은 아닌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장하시는 메시아, 구원자로는 믿지 못했다.
그래서 땅에 있는 것으로 인하여 표적을 보는 것 보다는
이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기를 원했다.
예수님이 모세처럼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게 하시거나
아니면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그런 표적을 보여 주시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겠다고 했다.

한심한 사람들 같이 보이지만
믿는 우리에게도 이런 모습이 남아 있다.
예수믿고 더 잘 믿기 위해 성경말씀외에 어떤 자극적인
말이나 현상을 끊임없이 보기를 원하는
신앙의 모습이 바로 그런 것이다.
잘 믿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은 잘 못된 것 아니다.
그러나 표적만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 표적이나 어떤 기이한 말이나 현상때문에
믿으려고 하는 신앙은 오늘 말씀에서
보여 주시는 무리들의 신앙과 같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표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으로 신앙을 지켜야 한다.
말씀으로 신앙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나?

24절에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예화이다.
“어떤 사람이 집안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다 쫓아내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수리를 했다.
그런데 쫒겨난 귀신이 가만히 보니 그 집안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이제는 일곱을 더 데리고 들어와서 산다.
그럴때 그집은 어떻게 되겠나 생각해 보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믿기 전의 불의하고 부정한 것들을 다 깨끗하게 제거했다.
그런데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않으면
이상한 것들이 들어와서 믿기전 보다도 더
잘못된 신앙으로 살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새로운 내 믿음의 집을 하나님의 선한 것으로
채우며 잘 관리해야 잘못된 이상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우리의 믿음의 집을 하나님의 선한 말씀으로 채우고 살므로
우리가 이시대의 표적으로 살아야 한다.
표적은 증표이며 사인이라고 했다.
사인은 볼수가 있고 보면 무엇인지 알수 있다.
십자가를 보면 교회인 것을 알 수 있다.
노란 “M”를 보면 멕도날드 임을 알수 있다.
마찬가지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인 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표적이 되어 존재한다.
자세히 보면 하나 같이 기적처럼 신기한 것들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이 하나님의 솜씨를 나타낸다.
표적은 사람이 한 일을 표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표적은 사람이 할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표적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사람도 포함 되어 있다.
정말 사람 만큼 신기한 하나님의 표적은 없다.
그 중에 더 신기한 표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살고 있는 표적이다.
왜 이것이 신기한 표적인가?
그것은 아무나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자격이 있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되고 싶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의 표적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표적이 되어살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면 이시대의 하나님의 표적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도  않고 신앙과 삶이 하나님을 떠나 있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사역 첫 말이나 예수님의
제자들도 가장 먼저 회개하라는 말씀을 선포했다.
회개하라는 말은 가장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다.
회개하라, 너 죄인이다, 너 시험들었다 하는 말들이다.
이 말들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말들이다.
반드시 인정하고 실천해야 할 말들이다.
그럼에도 민감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죄인으로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신앙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그 어떤 표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에 표적을 보여 달라는 무리들도 마찬가지다.
표적을 보지 못하여 보여 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표적을 보았지만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오지 않는 한 어떤 표적도 소용없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더이상 표적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대신에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가 표적이 된 것처럼
나도 이 세대에 표적이 될 것이다고 하셨다.
요나는 우리가 잘 아는데로 물고기
배속에서 3일 있다가 살아 났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무덤에서 3일 있다가
다시 살아 날 것이며 그 때에는 너희들의 더 이상
거부 할 수 없는 표적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만큼 큰 표적은 없게 될 것이라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촛점은 요나의 표적과 증거에 대한
니느웨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요나의 표적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이나 있다가 살아난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가 물고기 배속에서
3일간 있다가 살아난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리고 40일 후면 이 성이 망하니까 회개하라고 증거했다.
그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사람만 아니라
짐승들까지 금식하고 회개했다.
그럴때 다 살려 주셨다.

이처럼 가장 포악한 이방인들이
불순종한 요나의 증거에도 니느웨가 회개했다.
그러나 요나와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고 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시는 데도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판날에 이방인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 무리들을 심판하게 한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포악한 니느웨 사람들 처럼 아무리 크고 깊은 죄에
빠지더라도 회개하면 용서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회개하면 사람도 나라도 다 살리고
땅도 고치신다 약속 하셨다.
역대하 7장 14절 말씀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회개가 무엇이면 회개한 사람들을 어떻게
축복 하신다는 것을 한 절에 다 말씀하셨다.
1) 악한길에서 떠나, 2)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3) 내 얼굴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땅을 고치신다 약속하셨다.
날마다 순간순간 회개하여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표적이 되어 살라.
그러면 이시대의 하나님의 표적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으라.
마찬가지 오늘 말씀에 소개된 무리의 문제는
표적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표적을 보고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 였다.
이 시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말씀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말씀을 거부하고 듣지도 않고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계속 더 많은 다른 말씀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말씀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 들여야  한다.
말씀을 받아 들이려면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여는 상태는 내가 말씀을 듣고 어떤일이 있어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들이겠다는 준비자세이다.
그러나 이 무리들은 모든 상황에서 마음을 닫아 놓고 있었다.
그럴때 무슨 표적을 보든지, 무슨 말씀을 듣든지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말씀을 들으려고 마음을 여는 자세는 어떤 자세인가?
예수님은 남방여왕, 솔로몬의 지혜의 말씀을 들으려고
찾아온 스바 여왕의 예를 들고 있다.
스바는 아라비아 반도 남방의 예멘이라고 본다.
그기서 예루살렘까지는 1200마일 정도 된다고 한다.
이런 먼길을 지혜의 말씀들으려 왔다.
온갖 값진 선물을 잔뜩 싣고 왔다.
그 당시 교통 수단으로는 얼마나 먼지 땅끝이라고 하셨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라.
한 나라의 여왕이 모든 정사를 접어두고
그 나라의 수장들을 데리고 위험한 사막길을 여행했다.
솔로몬의 명성에 대한 소문만 듣고 찾아왔다.
솔로몬의 지혜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확신도 못했다.
솔로몬의 정식 초청장을 받은 것도 아니았다.
과연 만나 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어떤 것도 스바여왕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 마음에는 오직 말씀을 듣기를 마음만 있었다.

예수님은 이방인인 이 스바여왕도 예수님과 비교도 안 되는
인간 솔로몬의 말씀을 듣기위해 그 먼길을 찾아 왔다.
그러나 무리들은 스바여왕처럼 전혀 수고도 할 필요가 없다.
지혜 자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무리들의
바로 곁에 계심에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심판때에 이 스바여왕이 살아나서
이 무리들을 심판하게 하신다라고 하셨다.
이유는 단 한가지다.
스바여왕은 위험을 무릎쓰고 그 먼길을 여해하여
말씀을 들으려고 했고 그 당시 유대인 무리들은
말씀을 들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든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의 표적으로 살라.
그러면 이시대의 하나님의 표적으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라.
영적인 분별력이란 무엇인가?
이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아니면 사람이 원하는 일인가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사람을 위한 일인가도 분별 할 줄 알아야한다.
이 이일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생각인가도 분별해야 한다.
즉 모든 일에 하나님이 중심이 되게하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게하는 신앙과 삶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밝고 성한 눈으로 사는 것이라 하셨다.

여기서 눈은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다 들어와서 무한데로
뇌에 영상으로 저장된다고 한다.
마치 비듸오 카메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당장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도 저장된다고 한다.
문제는 무엇이 들어 오느냐에 따라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이 딜려있다.
오늘 말씀에도 눈이 건강하면 온 몸이 건강하고
눈이 나쁘면 온 몸도 건강하지 못하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영적으로도 해석해야 한다.
눈으로 좋은 것을 받아 들이면 영혼이 밝고 즉 건강하고
나쁜 것을 받아 들이면 영혼이 어둡고, 즉 병든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어둡고 병든 영혼은 육신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육의 의사이신 예수님의 진단이다.

그러면 건겅한 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불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등불은 눈을 상징한다.
등불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 빛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눈을 주신 이유는 빛을 보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눈이 있어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두움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빛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표적,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사역을 말한다.
밝고 성한 눈으로 이 빛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빛으로 우리 영혼을 채워야 한다.
그럴때 우리 영혼이 밝아지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된다.
36절에 네 속에 있는 빛이라 했다.
네속에 있는 빛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내속이 세상의 죄악된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닌지
내 속을 점검해 보라고 하셨다.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으로
채워져 있어야 영적 분별력을 가지게 된다.
다시 한 번 영적 분별력이란 무엇인가?
신령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은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을 우리 속에 채우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 대신에
세상적인 판단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구분한다.
그럴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분별하여 그 일에 헌신할 때이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므로 이 시대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이 되어 살라.

복습해보자.
이 시대의 그리스도의 표적이 되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1)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라.
2)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으라.
3)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라.
이렇게 살므로 건강한 영육으로 하나님의
일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을 기뻐시게 함으로
우리의 삶에 베푸시는 기쁜 일과 좋은 것을
받아 누리고 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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